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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inority의 긍지 (7) - 강근환
  글쓴이 : 가나안교회 날짜 : 10-02-01 13:46     조회 : 90    
 

Minority의 긍지 (7)

강근환 


  1968년 12월 초, 나는 드디어 토론토공항에 도착했다. 에큐메니컬 연수원의 직원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공항 밖으로 나와 보니 어둠이 짙었고, 토론토는 벌써 한겨울이 되어 길가엔 눈이 쌓여 있었다. 연수원 사무실에는 아직 불이 밝혀져 있었고, 초로의 할머니가 미소를 지으며 나를 맞아주었다. 그분이 연수원의 학감인 K 호킨 박사였다. 그녀는 뉴욕 콜롬비아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선교사의 따님으로 아직 독신이었지만 캐나다뿐 아니라 국제적인 에큐메니컬 운동의 지도자였다. 그분은 나에게 선생님이자 어머니 같은 존재였다. 그제서야 난 내 집에 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숙소는 임마누엘 대학 기숙사였고, 연구실도 하나 마련해줘서 혼자서 쓸 수 있었다. 연수원은 토론토대학교 내에 위치해 있어서 대학 강의에 참석하거나 도서관 이용하기에 편리했다. 거기다 용돈까지 지급되니 불편할 것이 없었다. 기숙사는 스팀장치가 얼마나 좋던지 가지고 온 두꺼운 내복은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그때부터 나는 내복을 입지 않기 시작해 칠십이 넘은 지금도 내복 없이 한겨울을 지낸다.

  토론토대학교는 한국의 대학교처럼 담장을 친 게 아니라 토론토 시가지에 오픈되어 있는 게 특징이었다. 토론토대학교는 여러 대학(College)과 대학교(University)로 구성돼 있었다. 그 대학들은 원래 각 기독교 교파를 배경으로 설립됐다. 영국의 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캐나다의 대학은 국내 대학교의 단과대학과는 다르다. 캐나다에서는 단과대학을 Faculty라고 부른다. 연수원에서 나는 토론토대학교 내의 신학대학을 돌아다니며 주로 에큐메니컬 운동과 선교학에 관한 강의와 세미나를 자유롭게 들을 수 있었다. 선교학을 공부하면서 나는 새로운 도전을 받았다. 한국에서는 선교학의 주된 관심사가 교회성장이었는데, 이곳에서는 타종교의 이해와 대화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타문화권에 나가 선교할 때는 교회성장보다는 타종교, 곧 그 나라의 재래종교에 대한 이해와 함께 어떻게 그들과 대화가 가능할지에 대한 모색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캐나다의 기독교는 가톨릭, 성공회 그리고 개신교이고, 개신교는 연합교회와 장로교회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한국인 교회는 아직 이민 초기여서 연합교회와 장로교회, 제3교회 세 개밖에 없었다. 연합교회는 건국대 총장을 지낸 정대위 박사가 담임하다가 이상철 목사가 이어받았고, 장로교회는 담임목사가 없어서 재일대한기독교회를 돕기 위해 일본에 파송되었다가 돌아온 캐나다장로교회 선교사들이 도왔으며, 제3교회는 교파성이 정해져 있지 않은 상태에서 유재신 목사가 담임하다가 박사학위 공부를 위해 떠난 후 김소영 목사가 맡게 되었다. 토론토에 사는 한국 교포는 500∼600명에 불과했다. 그들 가운데 기독교인들은 이들 세 교회에 나뉘어 예배에 참석하면서 이민생활의 외로움과 고달픔을 달랬다. 이민교회는 믿음의 공동체일 뿐만 아니라 사귐의 공동체 역할을 하는 한인 이민자들의 센터였다. 이런 이유로 한국에서는 교회를 나가지 않던 사람도 이민 와서는 교회에 나오는 사람이 많았다.

  나는 한 교회를 정하지 않고 두루 돌아다녔는데 일본에 있을 때 사귀던 캐다나장로교 선교사들과 친분이 있어서 장로교에 많이 출석해 돕곤 했다. 그리고 이상철 목사님이 연합교회에 오신 다음 더 자주 가게 되었다. 이민자들 중에는 광부나 간호사로 독일에 갔던 이들이 계약이 끝나면서 캐나다에 오게 된 분들도 적지 않았다. 토론토에는 아직 한국 식당이 하나도 없었다. 주말이 되어 한국 음식이 생각날 때면 난 안절부절못했다. 그럴 때 누가 전화로 식사 초대를 하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마침 임마누엘대학에서 박사과정을 하고 있던 손위의 형님 같은 기독교장로회의 박하규 목사 내외분께서 종종 초대하여 주셔서 참으로 고마웠다.

  토론토에 온지 얼마 안 돼 크리스마스를 맞았다. 이국, 특히 기독교 국가인 캐나다에서의 크리스마스는 인상적이었다. 네온사인이 반짝이는 눈 덮인 토론토의 시가지와 가옥들은 정겹고 아름다웠다. 사람들도 다정다감했다. 한국에서 대하던 미국 선교사들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캐나다는 겨울을 제외한 나머지 계절은 짧았다. 봄이 왔다 싶으면 금세 여름으로 접어들었다. 4월 말이면 봄 학기가 거의 끝나고, 8월말까지 여름방학이 계속된다. 응달엔 아직도 눈이 하얗게 쌓여 있는데 여름방학이라니 내게는 이 또한 신기한 일이었다. 봄 학기가 끝나면 연수 생활도 끝나는데, 계획을 세워야 했다. 아내와는 1년만이라고 약속하고 왔지만 어렵게 온 유학인데 그냥 연수만 마치고 돌아가기에는 아쉬움이 컸다.

  나는 정규 학위 과정을 밟기로 했다. 학비 문제는 차치하고 입학 허가를 받는 게 급선무였다. 대상 학교는 임마누엘과 녹스대였다. 임마누엘대에는 제이 박사라는 훌륭한 기독교 윤리학 교수가 있었다. 하지만 토론토대 신학부 책임자가 돼 학생 지도는 당분간 무리라고 했다. 모교인 서울신학대는 교회사가 공석이니 그 분야를 공부하고 오라고 했다. 마침 녹스대 교회사 주임교수가 패리스였는데 칼뱅 연구를 전공한 좋은 분이었다. 다행히 선교사들의 추천과 도움으로 녹스대 입학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첫째는 에큐메니컬연구원의 허락을 받는 일이고, 둘째는 아내의 양해를 얻는 일, 셋째는 학비였다. 캐나다에 체류하는 동안 내 신상에 관한 모든 책임은 연구원에 있었기 때문에 체류 기간 연장은 무리한 일이고 또한 무례한 일이었다. 아내와의 약속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에서 공부할 때도 신혼생활도 없이 지냈고, 귀국 후 얼마 되지 않아 떠나온 처지라 염치가 없는 일이었다. 사정이 사정인 만큼 가까스로 둘 다 허용은 됐지만 송구스럽기 그지없었다.

  나머지 문제는 학비를 해결하는 일이었는데, 내 자신의 힘으로 해결해야만 했다. 아르바이트를 하면 되겠지 하는 생각이었는데, 막상 찾으려고 하니 막막하기만 했다.

  학기말은 다가오고 마음은 초조해졌다. 마침 머리에 번뜩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었다. V 브린씨였다. 토론토에서 약간 떨어진 소도시 브램턴에 사는 전기회사 소장으로 지역 유지였다. 지난 겨울 나를 찾아와 만났던 사람이다. 상사가 한국을 방문하고 왔는데 한국에 대한 인상이 좋았다는 것이다. 자기들의 클럽 모임인 와이즈맨에 한국인을 초청해 한국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토론토 한인사회에 문의한 결과 나를 소개받았다는 것이다. 아직 서투른 영어로 모임에서 나와 한국을 소개했는데, 박수도 받고 클럽의 명예회원증도 받았다. 돌아오는 길에 브린씨가 혹시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할 일이 있으면 연락하라고 했던 것이다. 바로 그분에게 전화를 걸어 사정을 알렸더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면서 언제든지 날짜만 알려주면 일자리와 숙소까지 마련해놓겠다고 했다.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몰랐다.

  며칠 후, 브린씨가 차를 몰고 왔다. 짐가방을 싣고 차가 도착한 곳은 바로 브린씨의 집이었다. 집은 브램턴의 조용하고 아름다운 주택가에 위치해 있었다. 뒷마당은 잔디밭이 있는 예쁜 정원이었다. 거실을 거쳐 2층으로 올라가더니 방문 하나를 열고 그 방이 내가 사용할 방이라고 했다. 집 식구는 장모님과 아들딸 둘씩, 그리고 자기의 아내 등 모두 일곱 명이었다. 내가 들어오면서 딸들이 한 방을 쓰기로 하고 막내딸 방을 비어준 것이다.

  서양 사람들은 보통 아래층을 거실과 식당으로, 2층은 침실로 사용한다. 그래서 손님들이 방문해도 2층에 올라갈 일은 드물다. 2층은 식구들만의 세상이다. 화장실과 욕실도 거기에 있다. 그런데 나를 자기네 식구들 세상에서 함께 살자고 한 것이다. 나를 언제 보았다고 어떻게 믿고 이런 대접을 한단 말인가. 더군다나 동양에서 온 타국인을 말이다. 그들은 성공회 신자들이었다.

  저녁 식사시간이 되어 식탁에 앉게 되었다. 브린씨는 나를 자신의 왼쪽에 앉게 했다. 제일 귀한 손님을 앉히는 자리이다. 그리고 식구들에게 나를 정중히 소개하면서 "오늘부터 우리 식구가 되었으니 즐겁게 지내자"며 맞아줬다. 그렇게 편하게 대할 수가 없었다. 다음날부터 나는 일을 하러 갔다. 일하는 곳은 브램튼병원이었다. 그 시에서 제일 큰 종합병원이다. 병원으로 들어오는 모든 물품을 접수, 분류, 공급하는 것이 내 일이었다. 보관소에 품목별로 물품을 분류해 비치했다가 병원 각 부처로부터 요청이 오면 진열대에서 품목별로 수집해 배달했다. 별것 아닌 일 같은데, 해 보니 여간 힘들고 바쁜 게 아니었다. 들어오는 물건 중엔 드럼통, 큰 박스도 있어서 운반이 쉽지 않았다. 거기다 품목별로 분류, 비치하는 일과 요청서에 따라 여러 품목을 수집해 병원 각 부처를 돌아다니며 공급하는 일은 늘 부지런한 몸놀림을 요했다.

  동료직원 중 한 명은 책임자인 노인이고, 한 명은 나보다 어린 20대 청년이었다. 젊은 친구는 숙달된 솜씨로 물건도 쉽게 운반하고 품목별 물건도 곧잘 진열대에서 찾아 재빨리 일을 처리했다. 하지만 나는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어디에 비치해야 하는지를 몰라 허둥지둥 쫓아다니니 일이 더디고 바쁘고 힘들 수밖에 없었다. 점심시간 1시간, 오전 오후로 15분씩 두 번 커피 타임을 갖는 것 외에는 하루 종일 뛰어다녀야만 했다. 발은 붓고 불이 날 지경이었다. 노임은 시간당 1.8달러였다.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일을 하는데 점심시간으로 1시간을 제하고 하루에 8시간씩 일을 했다. 캐나다는 여름철에 월요일을 공휴일로 정하는 날이 많다. 긴 주말을 갖기 위해서다. 이때가 되면 모두들 차를 시외로 몰고나가 가족과 함께 즐겼다. 하지만 나는 월요일이 싫었다. 비정규직 아르바이트생에겐 월요일이 임금 없이 공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임금은 월급제가 아니고 2주마다 지급됐다. 처음으로 2주 임금을 지급받았을 때 외국에서 내 힘으로 일해 대가를 받았다는 게 그렇게 흐뭇할 수가 없었다. 집에 돌아가 저녁식사를 마친 다음 차를 마시며 브린씨에게 조용히 오늘 처음으로 임금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어서 "내가 당신 집에서 이렇게 잘 지내고 있는데 하숙비조로 돈을 낸다는 것은 결례가 되는 일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내가 일해서 받은 임금인 만큼 적으나마 조금 드리려고 하니 성의로 알고 받아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는 나를 한참 쳐다보더니 빙그레 웃으면서 "그 뜻은 고맙다. 잘 알겠다"고 말했다. 그러더니 가을학기에 지불해야 할 등록금과 기숙사비가 얼마나 되냐고 물었다. 그래서 내가 "여름방학 동안 이렇게 일해서 받는 임금을 합치면 얼마나 될 것 같으냐"고 되물었다. 둘이서 쳐다보면서 대충 계산을 해 보니까 당연히 어림없는 금액이었다. 시무룩한 나의 표정을 보더니 그는 "진작 그 사실을 알고 나름대로 대책을 강구 중"이라고 말했다. 나는 다시 한 번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좋은 분을 나에게 붙여주셨던 것이다.

  한번은 저녁식사를 하는 도중에 한국인의 생활습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남자들이 집안에서 어떤 일을 돕느냐고 묻길래 한국 남자들이 부엌일을 하는 것은 절대금물이라고 대답했다(지금은 세상이 많이 변했지만 그때만 해도 그건 사실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그 집에 있는 동안 부엌에서 접시 하나 닦지 않았다. 한번은 부인이 나에게 한국 격언 하나를 가르쳐 달라고 했다. 그래서 '일소일소 일노일로(一笑一少 一怒一老:한번 웃으면 한번 젊어지고 한번 화내면 한번 늙는다)'라는 말과 뜻을 설명해줬더니 아주 좋다면서 서툰 발음으로 몇 번이나 그 말을 되풀이 암기했다. 그리고 이따금씩 나를 만나면 그 말을 기억하고 외웠다. 지금도 그 집을 방문하면 그 말로 인사를 한다. 나는 그렇게 그해 여름, 그 다음해 여름 2년을 그 집에서 한 가족처럼 살았다.

  1969학년도 가을학기에 나는 녹스대학 신학석사(Th.M) 과정 교회사 전공에 등록하고 기숙사에 들어갔다. 알고 보니 일본에서 캐나다장로교회의 장학금으로 1년씩 왔던 재일대한기독교회 소속 목사들 외에는 내가 최초의 녹스대학 한국 유학생이었다. 당시 신학 전공 한국인 유학생은 토론토대 임마누엘대학 박사과정에 있던 박하규 목사뿐이었다.

  원래 교파별 배경에서 만들어진 토론토대에는 가톨릭 대학 3곳, 성공회 대학 2곳, 개신교 대학 2곳 등 모두 7개의 신학대학이 있었다. 그중 개신교 신학대학은 캐나다연합교회의 임마누엘대학과 캐나다장로교회에 속한 녹스대학 등 두 곳이었다. 임마누엘대학은 캐나다감리교회에서 1836년에 세운 빅토리아대의 신학부인 셈이다. 25년, 에큐메니컬 정신에 입각해 감리교회와 회중교회, 장로교회의 일부가 연합해 캐나다연합교회가 됐고, 캐나다장로교회의 신학교였던 녹스대학의 일부도 가세했다.

 한국에서 캐나다로 유학을 오면 자연히 캐나다연합교회의 장학금 혜택을 받아 캐나다연합교회에 속한 임마누엘대학으로 가기 마련이었다. 정대위, 문재린, 김정준, 서남동, 박하규 목사가 그런 분들이다.

  녹스대학은 1844년 캐나다장로교회에서 세운 신학대학이었는데, 1925년 캐나다연합교회가 형성될 때 일부는 임마누엘대학에 합세했고, 일부는 그대로 남아 지금도 캐나다장로교회 소속 신학대학으로 되어 있다.


   

내가 그 사면에서 불 성곽이 되며 그 가운데서 영광이 되리라 (스가랴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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