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nority의 긍지 (8)
강근환
이들 토론토대 내 신학대학들은 신학교육의 연합체로서 토론토신학대학원을 형성하고 있다. 따라서 풍부한 교수진과 다양한 신학 배경의 많은 장서를 보유하고 있는 각 대학의 도서관 활용도 자유롭다. 그런 면에서 토론토신학대학원은 이상적인 신학교육의 에큐메니컬 협력 기구라고 생각된다. 나는 여름에 일해서 모은 돈으로 등록금 일부와 기숙사비를 지불했다. 기초학위 과정은 목사 양성 과정이기 때문에 교단 차원에서 장학금을 주지만 상급 학위 과정에서는 이것이 없었다. 그래도 미국과 비교하면 싼 편이었다. 학기별로 등록금을 지불하지 않고 학위 과정별로 지불하고, 분할 지불도 가능했다.
그 당시 상급 학위 과정은 석사나 박사를 막론하고 600달러였다. 하지만 내가 가진 돈으로 등록금과 봄·가을학기 기숙사비를 지불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재정 문제로 누구에게든 누를 끼치게 되면 무엇보다도 나를 초청해준 에큐메니컬연구원에 면목이 없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체면을 지켜야 했다. 이것은 조국의 자존심에 관한 문제이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한 가지 방도가 보였다. 한국 교포들은 거의 이민 초기여서 생활이 넉넉지 못했다. 다행히 캐나다 정부는 이민자들이 언어교육을 받는 동안 생계비를 지급했고, 언어교육과 생업을 위한 기초교육이 끝나면 직장까지 알선해줬다. 하지만 항상 빠듯한 생활을 면치 못했다.
교포들은 그래서 정부에서 알선해준 직장 외에 또 하나의 일을 하곤 했다. 그 중 하나가 사무실 청소였다.
퇴근 후 출근 전까지 사무실이 비어 있는 동안 아무 때나 가서 청소를 하면 되는 일이었다. 주로 퇴근 후 저녁식사를 마친 다음 식구들이 모두 함께 가서 청소를 한다고 했다.
나도 사무실 청소를 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일자리를 얻으려면 먼저 권리금을 지불해야 했다. 월 보수의 3배나 되는 금액을 선불로 내든지, 아니면 5개월간 무보수로 일을 해야 했다. 돈이 없던 나는 5개월간 무보수로 일하기로 결심하고 소개를 받아 일을 시작했다. 나는 가지고 있던 약간의 돈으로 청소도구를 구입했고, 매일 밤 일터인 사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의 일터는 공장 옆 회사 사무실이었다. 기숙사에서 걸어서 갈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출근하면 먼저 쓰레기통을 비우고 청소기로 사무실 바닥을 빨아들인 다음 물 걸레질을 한 후 걸레로 책상 등을 닦는 일을 했다. 일주일에 한두 번 바닥 왁스칠도 했다. 이를 위해 기계사용법도 익혀야 했다. 그렇게 5개월간 일하고 나서야 나는 드디어 권리를 얻었다. 생계 걱정 없이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귀국 비행기표도 되돌려 받을 권리금으로 해결하면 끝이었다.
토론토대학교 캠퍼스 내에서 녹스대학 기숙사는 최고로 통했다. 식당 건물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높은 천장, 내부 장식이 그만이었다. 맨앞에는 약간 높은 단상에 교수들 식탁이 가로놓여 있고, 그 앞에는 학생들의 큼직한 식탁들이 세로로 줄지어 있다. 캐나다의 대학은 캠퍼스 건물 중에서도 예배드리는 채플실과 도서관, 식당을 제일 중시하고 잘 건축했다. 방은 독방인데 아줌마들이 매일 침대 정리, 방 청소를 해준다. 식당은 거의 호텔 서비스 수준이었다. 식단에 따라서 좋은 음식들이 나오는데, 모자라서 손을 들면 아줌마들이 곧바로 갖다 준다. 한번 기숙사에 입사하면 귀공자가 되는 것이다. 신분에 상관없이 모두가 평등하고 당당했다. 식당에 들어갈 때마다 내가 먼저 들르는 곳이 있었다. 식당 입구 계단 옆의 우편함이다. 식당 출입 때마다 우편함을 들여다보았는데, 우편함에 편지라도 한 통 들어 있는 날이면 월척을 낚은 기분이었다. 잠자리에 누우면 집 생각과 돌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귀여운 아들놈의 깔깔대며 웃는 얼굴이 떠올랐다.
나는 한국교회사를 연구 분야로 정했다. 에큐메니컬연구원 시절 선교학 세미나에서 한국 교회의 역사에 대해 새롭게 눈을 뜨게 된 게 계기였다. 한국에서는 아직 이 분야는 미개척지나 다름이 없었다. 한국교회사 강의는 서울신학교 시절 숭실대의 김양선 목사님으로부터 약간 접했던 게 전부다.
캐나다에 와서는 영문으로 된 백낙준 박사의 예일대학 박사논문을 내용으로 한 '한국개신교사'(내가 귀국한 후 1973년에 백 박사가 번역해 출판)를 읽고서야 한국 교회의 역사에 대해 본격적인 관심을 가졌다. 나는 논문 제목을 '해방 후에 나타난 한국 교회의 문제성에 끼친 초기 주한 선교부의 선교정책의 영향'으로 정했다. 자료를 찾기에 어려운 점이 많았으나 도서관 시스템이 좋아 큰 도움이 됐다. 그런데 뜻밖의 문제가 생겼다. 사무실 청소 비용문제였다. 입금되어야 할 월급이 몇 달째 오지 않았던 것이다. 보낸다는 얘기를 듣고 설마하며 기다렸지만 끝내 소식이 끊기고 말았다. 나의 월급은 일하는 회사에서 직접 받는 게 아니라 그 회사에서 위탁한 청소대행업체로부터 받게 되어 있었다. 하도 답답해 일하는 사무실 회사로 찾아가 이 사실을 알렸더니 자기들은 매월 월급을 꼬박꼬박 지불했다는 것이다. 이런 낭패가 어디 있단 말인가. 고민 중에 있는데 스위스에서 온 W 데디라는 동료가 몇 번씩이나 내 얼굴을 유심히 보더니 무슨 문제가 있냐고 물었다. 그리고 결례가 안 된다면 알려 달라며 조르기 시작했다. 나는 시치미를 떼고 아무 일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스위스 개혁교회 목사인 데디는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장학금으로 캐나다에 유학해 종교개혁 시대에 대해 논문을 쓰고 있었다. 마침 나의 주임교수가 논문 지도교수가 되어 우리는 외국인이라는 동질감으로 가까이 사귈 수 있었다. 챙피스럽기도 하고 자존심에 관한 문제여서 끝까지 숨기려고 했지만 결국 어쩔 수 없이 사정을 털어놨다.
친구 데디 목사는 나의 주임교수요 자기의 지도교수인 페리스 교수를 찾아가 청소 대행업체로부터 월급을 떼인 내 사정을 알렸다. 다음날 페리스 교수가 나를 만나자고 불러 연구실에 찾아갔더니 측은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대단히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런 형편인 줄도 모르고 나에게 너무 무관심했노라며 오히려 사과까지 했다. 그 말을 듣고 바로 자기의 변호사를 통해 알아보았더니 그런 악질업자가 있다는 것이다. 아직 국내 사정에 밝지 못한 이민자들을 대상으로 사기를 치는 못된 사람들이니 어쩔 도리가 없다면서 체념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당장 이민 신청을 하라고 했다. 그 당시는 입국 종류에 상관없이 캐나다 입국자는 누구든 이민 신청이 가능했다. 페리스 교수는 이민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고 단지 임시비자를 영구비자로 바꾸는 것으로 생각하면 된다고 말했다. 내 마음 속 갈등을 지레 알고 하는 말 같았다. 그 말이 맞다고 생각돼 곧바로 이민신청을 했더니 얼마 후 허락이 떨어졌다.
내가 일자리를 잃은 후 에큐메니컬연구원의 호킨 박사가 어떻게 나의 사정을 알았는지 제안을 하나 했다. 연구원 원장인 퍽슬리 박사 내외분이 자기 집에서 나와 같이 살았으면 좋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자기도 그 제안이 좋다고 생각한다면서 조심스럽게 권했다. 호킨 박사는 혹시나 내 자존심을 상하게 할까봐 무척 신경을 쓰는 듯했다. 옥스퍼드와 예일대 출신인 퍽슬리 박사는 성공회 선교사로 인도에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캐나다 동부 맨끝 노바스코샤주 핼리팩스에 있는 킹스대학 학장을 지낸 인물이다. 자녀가 셋 있지만 모두 출가했고, 현재는 두 부부만 살고 있었다. 거저 와서 살라는데 오히려 사정조로 말하니 몸둘 바를 모를 지경이었다. 나는 감사한 마음으로 순응했다.
집은 크지 않은 편이지만 그 지역은 토론토대학 총장 저택도 있는, 토론토에서는 고급 주택가였다. 우리는 그날부터 한 식구로 살았다. 매일 차를 함께 타고 에큐메니컬연구원으로 출퇴근했다. 집 청소는 도우미 할머니가 일주일에 한두 번씩 와서 깨끗하게 해줬다. 밥도 주고 세탁도 해 주고, 나는 귀한 아들 대접을 받았다. 주말이면 부부는 반드시 시골집을 갔다. 그리고 주말에 내가 먹을 음식을 준비해 냉장고에 넣고서는 데워 먹을 수 있게 했다.
퍽슬리 박사는 원래 호킨 박사와 함께 SCM운동을 했었다. 중국의 기독교 지도자이기도 했던 남경신학교 교장 딩 주교도 토론토에서 같이 SCM운동을 하던 동지다. 이따금씩 에큐메니컬 지도자들이 토론토에 방문할 때면 저녁식사도 대접했다. 그럴 때면 나도 식탁에 동참했다. 한번은 초대 WCC 총무였던 비사트 후푸트 박사가 방문해 함께 저녁식사를 한 적도 있다. 그런 분을 친숙한 분위기의 식탁에서 만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다행히 논문 심사도 잘 통과됐다. 논문 지도교수는 에큐메니컬연구원의 호킨 박사였다. 그분은 부모를 이어 중국선교 경험이 풍부했기에 한국 교회의 선교문제도 지도해 주셨다. 내 논문 내용은 해방 후에 나타난 한국 교회의 문제성과 초기 주한선교부의(장로교 중심) 선교정책을 연관시켜 문제성의 요인을 해명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 논문에서 주한 선교사들이 설정한 초기 선교정책인 '선교정책 개관 10개항'은 네비우스 원칙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서 한국 교회의 성장에 공헌한 바도 있지만 한국 교회의 문제성에도 책임이 있음을 입증했다. 그 과실은 선교사들이 선교정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네비우스 원칙에 성실치 못했다는 것이다.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던 어느날 페리스 교수님이 보자고 해서 찾아갔더니 웃는 얼굴로 대뜸 박사과정에 지원하라고 했다. 석사학위 논문심사에서 우수 논문으로 뽑혔기에 학점 이수학년을 1년 감면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가능하면 이 기회를 놓지지 말고 계속하라고 강권하셨다. 하지만 귀국을 또 연기한다는 소식을 듣고 놀랄 아내의 얼굴을 상상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미안한 마음으로 집으로 편지해 부모님과 아내의 양해를 구했다. 아내는 1년 만 더 기다려주겠다는 답서를 보내왔다. 얼마나 힘든 결단이었을까. 이제 남은 것은 학비 마련이었다. 마침 페리스 지도교수께서 일자리도 구해주셨다. 여름방학 동안 기숙사에 있으면서 보수·수리, 페인트 작업을 돕는 일이었다. 숙식도 기숙사에서 해결할 수 있어 문제가 없었다.
한여름 내내 땀을 흘렸다. 급료도 좋은 편이었다. 퍽슬리 원장은 여름이면 노바스코샤로 가서 자녀들과 함께 여름을 지냈다. 난 일을 마친 후 다시 퍽슬리 원장 댁으로 들어가 가을학기부터 이듬해 봄까지 박사과정 수업을 들었다. 1972년 4월, 봄 학기 종강과 함께 나는 더 이상 박사과정 강의를 들을 필요가 없었다. 한두 가지 세미나 과목의 학기말 리포트만 제출하면 됐다.
이제 또 하나의 어려운 결단이 기다리고 있었다. 귀국할 것인가, 아니면 가족을 초청해 머무르면서 박사학위를 취득할 것인가. 국내 사정상 가능한 한 해외에 있고 싶었다. 더구나 캐나다 이민비자까지 받아놓았으니 문제도 없었다. 가족도 이민 신청을 하면 쉽게 올 수 있었다. 그런데 마음이 얼른 정해지지 않았다. 그때 마침 모교인 서울신학대학에서 9월 학기부터 강의를 맡아달라고 성화였다. 결국 여러 모로 궁리한 끝에 귀국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여비 마련이 관건이었다. 마침 그해 여름, 특별한 아르바이트 일감을 신청해 용하게 허락을 받았다. 온타리오 주정부 산하기관인 10대 소년들의 갱생원 보조 원목 자리였다. 특수학교라 불리는 이곳은 주거지역과 떨어진 곳에 있으면서 일반 교육과 함께 갱생 교육을 실시했다. 내 역할은 주임 원목을 도와 정기예배를 주관하고, 아이들과 운동이나 놀이를 하거나 개인면담을 실시하는 일이었다.
반짝이는 파란 눈에 노란 금발의 아이들은 청순해보였다. 어떻게 이런 아이들이 이곳에 오게 되었을까. 그들이 저지른 나쁜 짓이란 하찮은 좀도둑질에 불과했다. 마리화나나 대마초를 피우다 돈이 필요하니까 남의 집에 들어가 물건을 훔치게 된 것이다. 물론 그 배후에는 가정문제가 있었다. 부모들의 이혼으로 자녀들은 양부나 양모 밑에서 학대를 받거나 방치되었던 것이다. 소년원의 일은 육체적인 힘든 노동보다는 훨씬 쉬웠다. 급료도 비교적 좋았으며 캐나다 사회의 심층을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됐다. 소년원 일을 하면서 남은 리포트를 짬짬이 작성해 학교에 제출했다. 8월 말까지 소년원 일을 마치고 9월 초에 캐나다를 떠나 귀국하게 됐다. 다행히 소년원에서의 여름방학 아르바이트로 귀국 여비뿐 아니라 약간의 용돈까지 벌 수 있었다. 나는 귀국 길에 유럽을 경유하기로 했다. 그래서 토론토를 출발해 런던∼제네바∼파리∼홍콩∼오사카를 거쳐 서울에 도착하는 비행기표를 샀다.
엄청난 돈이 들 것 같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여름방학 시즌이 되면 학생들을 위한 전세 비행기가 많았다. 항공료도 저렴했다. 그렇게 유럽을 돌아와도 태평양을 건너 한국에 오는 것보다 비싸지 않았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항공권으로는 홍콩까지만 가게 돼 있었다. 전 세계를 이처럼 저렴하게,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서양 사람들이, 그리고 그 사회가 부러웠다.
유럽 경유는 내게 무척 유익했다. 런던을 거쳐 제네바에 들렀다. 마침 박상증 선생님이 WCC에 근무하고 있을 때였다. 미리 통지했더니 비행장에 마중까지 나와주셨다. 무척 반가웠다. 박 선생님 집에 가서 치즈로 된 특별 스위스 음식을 맛봤다. 몽블랑 근처의 관광지까지 구경시켜 주셨다. 우리는 그동안 쌓였던 이야기를 나누며 회포를 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