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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원 선교 (2) - 유현목
  글쓴이 : 가나안교회 날짜 : 10-02-28 10:10     조회 : 82    

병원 선교 (2)

유현목

 

많은 시간을 그와 교회에서 함께했다. 그는 나에게 자신이 만난 주님에 대해 들려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여러 인생 경험담을 이야기해 주었다. 내가 첫 번 교인이었기 때문에 많은 배려가 있었던 것이다. 주일 예배 후에는 언제나 그의 집에서 국수 잔치가 벌어졌다.

가난한 전도사의 집에 먹을 만한 것이 있을 리 없었다. 국수를 삶아 맹물에 간장을 넣어 먹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 맛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환상적인 맛이었다. 그와 그의 아내 김영희 사모의 따뜻한 관심과 배려는 교회 생활에 재미를 더하게 만들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잘 몰랐다. 하지만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 사람을 대하는 사랑은 세상 삶과 너무 달랐다.

개척교회에서 기도를 배웠고 통신으로 성경 공부도 했다. 기독교의 기본 진리를 배웠다. 그런데 예수가 나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는 믿어지질 않았다.

"2000년 전 예수가 어떻게 날 위해 죽으셨느냐?"는 질문을 통신사에 편지로 했다. "복음에 대한 진리는 담임 전도사에게 물어 보길 바란다"는 회신이 왔을 뿐이었다.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당시 나는 새벽기도에 참여하라는 권유를 받고 매일 기도회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전도사님은 나오지 않고 사모님만 나와 목 놓아 울고 계셨다. 가만히 앉아 울음 그치기를 기다리다 사모님께 다가가 물었다.

"왜 전도사님은 못 나오셨지요?"

사모님은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함께 집에 가자고 하셨다. 사택에 가보니 전도사님이 계속 기침을 하고 있었다. 기침할 때마다 그의 입에서 피가 쏟아졌다. 유달리 그의 얼굴 혈색이 창백했던 것도 많은 양의 피를 쏟으며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그는 백혈병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기도했다.

"하나님 당신이 살아계시면 우리 불쌍한 전도사님을 살려주십시오."

간절히 기도를 드렸다. 그 후 그는 교회를 부탁한다는 말씀을 나에게 남기고 기도원으로 훌쩍 떠났다. 당연히 교회 열쇠는 내가 맡아 관리해야 했다. 교인이 나뿐이니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전도사님이 기도원에 머문 시간이 약 3개월가량이었는데 그 기간 동안 내가 새벽 예배를 인도했다.

말이 예배 인도이지 혼자 기도하는 날이 더 많았다. 말씀 한 절 읽고 찬송 한 장 하는 게 전부였다. 기도하는 법을 잘 몰랐던 나는 어린 시절 셋집 양옥교회에서 배운 기도 방법으로 기도드렸다.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아멘으로 마치는 것이다"라고 배운 대로 기도를 마칠 때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고 새벽 기도회를 마쳤다.

새벽 기도를 드리는 생활을 석 달 정도 계속했다. 내 앞날을 위해 간절히 기도를 드렸다. 어느 날 마음에 뜨거운 은혜가 임했다. 내가 죄인인 것과 예수님이 나를 위해 피 흘려 죽으셨음이 분명히 믿어졌다.

"내 죄 사함 받고서 예수를 안 뒤 나의 모든 것 다 변했네 지금 나의 가는 길 천국길이요 주의 피로 내 죄를 씼었네"

 

찬송가 가사처럼 죄사함의 확신이 내게 임했다. 둘째 아들이 잘못될까 늘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셨던 어머니의 염려가 사라졌다. 모든 악습으로부터 단절이 일어났다. 이해의 대상을 넘어 동업의 대상이었던 아버지가 이제는 전도의 대상이 됐다.

삶의 변화가 오자 자연스레 세상 친구들은 멀어졌다. 그리고 교회 가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일이 됐다. 잠을 자면서도 하나님을 불렀다.

"아버지" "아버지" 하고 부르면 방을 함께 썼던 아버지는 당신을 부르는 줄 알고 벌떡 일어나시는 해프닝도 심심치 않게 있었다. 그런 거듭남의 경험으로 마음을 주체할 수 없을 때 주님은 다른 은혜를 주셨다.

환상의 경험이었다. 눈을 감아도 보이고 눈을 떠도 보였다. 내 머릿속에서 떠나가질 않았다. 사람은 보이지 않고 무슨 양동이 같은 것이 내 머리 위에서 붕 떠 기름을 붓는 것이다.

전도사님이 안 계신 3개월 동안 새벽 기도 시간에 여러 가지 신비한 일들을 경험하게 됐다. 어느 정도 건강이 회복돼 기도원에서 내려온 전도사님은 나의 이런 경험을 들으시고 신학 공부를 권유하셨다. 적지 않은 망설임이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전도사님의 권유를 따르기로 했다.

많은 기도의 응답이 있었다. 그 가운데 군 복무 중이던 형의 일이 기억이 난다. 주님을 알지 못했던 그는 당시 몇 달 전 군에 입대해 전방 근무를 하고 있었다.

추운 겨울 어머니와 함께 첫 면회를 갔다. 형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훈련을 받고 경계 근무를 하느라 얼굴과 손이 다 터 있었다.

면회소에서 만난 형은 많은 눈물을 보였다. 복받쳤던 설움이 한 번에 다 분출되는 듯싶었다. 하루 외박을 받아 부대 근처 여관에서 하룻밤을 함께 묵게 됐다. 형은 너무나 힘든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했다.

여러 이야기를 하던 중 "가장 용이한 부서가 무어냐?"고 묻자 형은 "행정병이나 군종병"이라는 대답을 했다. 면회 후 나는 집에 돌아와 형을 위해 작정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우리 형이 너무 불쌍합니다. 행정병 아니면, 군종병이 수월하다고 하는데 행정병보다는 군종병이 더 좋을 듯싶습니다. 형은 예수를 안 믿지만 군종병에 발탁돼 예수 믿고 봉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난 어린 아이와 같은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세상에 예수를 믿지도 않는 사람이 어찌 군종병이 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나는 지극 정성으로 매일 기도를 드렸다.

두 달 후 형에게서 군종병으로 배치됐다는 편지 한 통을 받았다. 대대 군종병이 갑자기 사정이 생겨 그만두게 됐는데 마땅한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대대에 신앙이 돈독한 병사가 없어 글씨 잘 쓰는 병사라도 찾게 됐는데 차트 글씨를 잘 쓰는 형이 발탁됐다는 것이다. 형이 나 때문에 먼저 주의 종이 된 것 같아 기뻤다. 무엇보다 기도대로 이루어진 것이 신기했다.

 

성서신학교(현 서울기독대학교)에 1978년 입학했다. 성경 한 줄 제대로 모르는 내게 신학공부는 너무 생소한 것이었다.

그 때 내가 만난 사람이 있었는데 3학년 선배 길지환 전도사였다. 길 전도사는 결핵을 앓다가 주님을 만난 사람이었다. 그는 건강이 좋지 않아 여러 번 휴학을 한 만학도였다. 하지만 당시 무디나 빌리 그레이엄 목사 등 대중 전도자들의 영향을 받아 노방 전도에 열심인 학생이었다. 그런 그가 자신의 삶과 꿈을 말하며 내게 자신의 노방전도팀에 합류할 것을 권유했다.

"유 형제님. 나와 함께 전도합시다."

형님처럼 친근한 그를 따라 나는 노방 전도팀에 합류하게 됐다. 전도 장소는 남산이었다. 당시 남산은 구경거리가 많지 않았던 때 사람을 가장 많이 만날 수 있는 좋은 전도의 장소였다.

나는 기타를 조금 칠 줄 알았던 터에 졸지에 남산전도단 리드 싱어가 됐다. 기타를 치며 7∼8명의 대원들이 찬송이나 복음 성가를 불렀다.

노래를 부르면 사람들이 음악당 앞으로 순식간에 몰려들었다. 절묘한 현상이었다. 야외음악당 앞에서 노래를 부르니 유명 연예인들이 와서 공연을 하고 있구나 싶어 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 같았다.

함께 기타를 치며 전도에 동참했던 젊은 형제가 있었다. 온누리교회 하용조 목사의 동생 하용인이다. 1∼2년 그와 함께 활동했다. 그는 영국으로 유학을 가 목사 안수를 받았다. 지금은 한국에서 찬양 경배 단체를 만들어 찬양으로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됐다. 가끔 그의 집회 모습을 인터넷으로 보면 남산 야외음악당에서 목소리를 높여 복음을 전했던 그의 모습이 생각난다.

전도팀 리더였던 길지환 전도사는 노래를 듣고 모여온 대중을 향하여 말씀을 전하곤 했다. 그리고 나와, 하용인 윤덕재에게도 말씀을 전하도록 권했다.

신학대 1년 초년병이 무슨 말씀을 전할 것인가? 지도자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었던 나는 예수믿고 일어난 삶의 변화를 전하곤 했다. 그 때 대중 전도의 담력을 얻었다.

당시 전도에 관한 성경 말씀을 많이 암송했다. 부지런히 전도에 관한 말씀을 암송한 것이 나에게 많은 유익이 되고 후에 사역에 큰 힘이 됐다.

당시 네비게이토 선교회에서 오래 활동을 해온 김태현 양인국 김깁수 이윤호 등을 만났다. 남산으로 개인 전도를 나왔는데 우리 전도현장을 보고 깜짝 놀랐다. 자신들 선교회에서는 경험하지 못했던 일들을 보며 그들은 우리와 교제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노방전도를 통해 말씀에 기록된 여러 영적인 일들을 경험했고, 우리는 그들에게 성경과 체계적 양육 방법을 배웠다. 그 때 수고했던 양인국은 서신선교회, 서신교회를 개척하고 장로교 목사가 됐다. 함께 전도에 동참했던 김태현은 해외 선교사 활동을 하고 있고, 이윤호는 미국 유학과 인도네시아 선교를 마친 후 국내 치유전문 사역자로, 윤덕재는 이스라엘 한인교회 담임 목사로 시무 중이다.

허전한 마음을 달래러 남산에 올라왔다 전도를 받고 신학생이 된 이일순은 목사 배우자를 만나 결혼한 후, 아프리카 케냐로 부름을 받았다. 남편과 함께 신학교 사역과 교회개척 사역을 계속하던 이일순은 교회 순회 중 교통사고를 당했다. 사랑했던 케냐 땅에 묻히는 무명의 순교자가 된 것이다. 그는 떠나갔다. 하지만 그가 개척한 케냐 신학교는 케냐 정부의 인가를 받아 많은 경목과 군목을 배출하고 아프리카 선교의 전초기지로 쓰임받고 있다. 할렐루야!

 

함께했던 사역자들이 미국과 영국 유학, 교회 개척, 선교회 설립 등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나는 예전에 남산전도단에서 함께 활동했던 조영숙 집사 소개로 만난 4명의 청년들과 병원선교회를 시작하게 됐다.

사실 병원선교는 계획에 없던 것이었다. 성경을 공부하며 전도를 위한 한 방법일 뿐이었다. 하지만 병원선교를 결심하게 된 사건이 일어났다. 1983년 겨울. 우리 모임에 소속된 한 자매가 한림대 부속 강남성심병원으로 발령나 근무하게 됐다. 자연스레 그 병원 환자들은 우리의 전도 대상이 됐다.

병원선교회 회원들은 기타 하나 들고 병실 복도에서 복음성가를 불렀다. 난생 처음 해보는 병원선교 활동이었다. 병원이라는 낯선 곳에서 환자들을 상대로 전도가 시작된 것이다. 모두 20대 초반의 젊은 형제와 자매들이었다.

"내 영혼이 여호와로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가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시 34:2)

병원 복도에서 부르는 찬양은 은혜가 넘쳤다. 찬양 후 각 병실에 들어가 예수님을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향한 위대한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그것은 우리 한 사람도 멸망당하지 않고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독생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간단한 복음 메시지였다. 하지만 그 병실 입원 환자 4명이 모두 예수님을 영접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병실 환자 모두 성도가 됐으니 이제 예배를 드립시다. 여기가 교회입니다."


   

내가 그 사면에서 불 성곽이 되며 그 가운데서 영광이 되리라 (스가랴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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