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선교 (4)
유현목
어느 날 주일 병원예배를 인도하기 위해 병원 입구로 들어가는데 누군가가 깍듯이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유 전도사님?"
"네. 그런데 누구시지요?"
나는 양복 입은 사람들보다는 환자복을 입고 있는 사람이 더 친숙하다. 환자복을 입으면 모두 환자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환자복 입고 있으면 환자일 뿐이다. 그래서 환자로 만나는 것이 훨씬 편하다.
"저를 모르시겠어요?"
"글쎄요…."
"1989년 교통사고로 목을 다쳐 6개월 동안 입원해 있었던 환자입니다. 그 때 제가 전도사님이 인도하던 예배에 나가 은혜를 받고 예수 믿고 퇴원했는데 감리교 권사가 됐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주님께 감사드린다. 나는 잊어먹고 있었는데 주님은 당신의 말씀대로 열매를 맺게 하신 것이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네게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사55:11).
남부경찰서에서 근무하는 이기제 경사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야간 근무 중 손가락이 절단되는 사고를 당했다. 난동을 부리는 취객을 유치장에 밀어 넣으려고 실랑이를 벌이다가 당직 의경이 너무 세게 문을 닫는 바람에 손가락이 유치장 문에 끼여 절단됐던 것이다. 이 일로 이 경사는 병원에 입원하게 됐다. 그는 교회를 다녔지만 진정한 복음의 실체는 몰랐다. 주일에만 교회에 다니는 소위 '선데이 크리스천'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병원선교회는 그가 입원해 있는 동안 병상 성경 공부를 실시키로 했다. 5단계로 기초 성경공부였는데, 구원의 확신을 심어주는 알찬 프로그램이다. '병원 선교'는 다른 사역과는 달리 이점이 몇 가지 있다. 그 중 하나는 환자들이 장기간 입원해 있어 전도의 기회가 많다는 것이다. 정형외과 환자로 입원한 경우 최소 4주, 많게는 1년 이상 입원하곤 한다.
대부분 사람들은 일단 입원을 하면 분주한 삶이 정지된다. 자신을 돌아보며 고통과 싸우는 시간이 이어진다. 어지간한 사람들은 모두 순한 양이 될 수밖에 없다. 주님이 구원하기로 작정된 사람 중 대부분은 이곳에서 구원을 받는다. 하지만 여기서도 마음의 문을 열지 않는 사람이 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에게 맞는 방법으로 그들을 다루시곤 했다. 심지어 교통사고로 4차례나 입원하고도 마음을 닫은 채 지내다가 마지막에는 버스를 몰고 가다 졸음운전 끝에 언덕으로 구르는 사고를 당한 뒤 임종 전에 예수를 믿는 사람도 봤다. 육체의 아픔은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할 시간을 주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경사에게 구원의 복음을 가르치고, 기도 응답의 확신을 가르쳤다. 그리고 말씀을 암송하는 과제를 주었다. 성실한 인격을 가지고 있던 그는 입원 기간 성경공부 과정을 잘 따라왔다. 그러자 얼마 후 그의 삶에 변화가 찾아 왔다. 퇴원 후 사비를 털어 전도지를 만들었고 다른 환자들을 찾아다니며 전도지를 주며 복음을 전했다. 남들이 마다하는 곳으로 자청해 근무를 하고, 복음 전도자의 입장을 잘 이해하는 겸손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다. 손해배상 소송에서 소득 입증이 어려웠던 환자들의 오래된 주거 기록과 직장 기록을 찾아 주기도 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을 베푸는 사람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병상 전도는 평균 1분, 짧게는 그 이하로 할 때가 많다. 짧게, 장황하지 않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병상전도의 방법이다. "환우님. 교회 십자가 많이 보셨죠? 십자가는 기독교의 상징입니다. 저 십자가에서 죄 없으신 예수님이 죄 있는 우리들을 위해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을 믿자는 것입니다. 돌아가신 예수님이 어떻게 된 줄 아십니까?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환우님도 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믿으면 반드시 구원을 얻습니다."
이렇게 짧게 복음을 전하고 주님을 영접하게 되면 병상 개인 양육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들이 병원에 머무는 동안 예배에 참석케 하고 퇴원 후 심방과 편지 등으로 그들을 격려하며 가까운 교회로 나가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것이 '병원선교' 사역이다. 병원선교회는 아직도 미완성의 기도 제목이 있다. 원목실을 구하는 일이다. 1983년부터 지금까지 긴 시간 병원사역을 계속하는데 아직도 원목실이 없다. 인근 여러 교회와 협력하는 업무를 하고 병실에서 할 수 없는 상담과 간절한 기도 장소인 원목실이 필요하다. 병원선교회 환우들은 예배 시간마다 이 기도 제목을 놓고 합심 기도를 드리고 있다.
1990년 4월 새생명병원선교회의 열성 교인인 이진숙 집사가 전화를 걸어왔다.
"전도사님. 상의할 게 있어요. 사무실로 갈게요."
사무실로 찾아온 이 집사는 내 사역의 비전과 결혼 상대자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당시 나는 결혼을 생각했던 사람과 헤어져 크게 상심하고 있던 때였다. 그래서 주님께 항의 아닌 항의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주님. 저를 이렇게 몰라주십니까? 제가 이렇게 열심히 전도하고 주를 위해 헌신하는데 왜 결혼이 깨지는 아픔을 주십니까? 이제 연애 안 합니다. 은혜 받은 사람을 소개받으면 그 때나 장가 갈랍니다."
나도 모르게 이런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이 집사에게 내 신상에 관한 세세한 말을 할 수 없었다. 전도사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자매"라고 짧게 대답을 했다. 그랬더니 이 집사는 자신의 딸을 내게 소개하겠다는 날벼락같은 이야기를 꺼냈다.
고 2때 병실에서 처음 봤던 이 집사의 큰딸 임복향은 이제 겨우 대학 1학년이었다. 무엇보다도 이 집사의 딸은 나와 나이 차가 12년에 달했다. 이 집사가 내게 이런 무례함(?)을 저질렀던 이유는 꿈 때문이었다. 꿈으로 결혼을 시키라는 응답을 받았다는 것이다. 자신의 딸과 내가 많은 사람의 축복을 받으며 결혼하는 생생한 꿈을 꾸었다고 한다. 그래서 남편의 허락을 받아 이런 용맹스러운 일을 감행하게 된 것이란다. "이런 기가 막힐 일이…."
무슨 말을 할 수 없었다. 그 때 주님이 이런 지혜를 주셨다. "내가 대답할 것이 아니라 딸이 2주 기도해 보고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아멘 하면 결혼하겠습니다." 위기를 빗겨나가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100% 그런 일이 안 일어날 것으로 확신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집사의 진지한 제안을 거절하기 어려웠다.
이 집사는 병원 선교회 사역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러 해 함께하며 진지한 대화와 교제, 사역의 전 영역에 이 집사의 손이 안 미치는 곳이 없었다. 선교와 구제는 물론, 식당 당번과 교회 청소까지 모든 교회의 사역을 도맡아 하고 있었다. 이 집사는 교회 일이 생기면 즉시 뛰어나와 함께 심방을 하고 섬기는 신실한 교인이었다. 많이 기도하고 늘 성령의 감동을 따라 사는 이 집사의 말에 무조건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재미난 것은 당사자인 딸의 반응이었다. 엄마의 말을 들은 딸은 목 놓아 울었다고 한다.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이 다니는 교회의 전도사를 엄마로부터 소개받았다는 것이 서러웠다고 한다. 또 사모가 될 생각은 없었다고 한다. 게다가 결혼에 대한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그것도 다리를 저는 장애를 가진 가난한 전도사. 게다가 12살의 나이 차이. 엄마를 원망하며 울고 또 울었다고 한다. 그런데 한참을 울고 나니 울지만 말고 기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2주만 기도해 보자." 그녀는 서울 집에 올라오지 않고 재학 중인 충남 온양 순천향대학교 기숙사에서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하나님. 엄마 때문에 너무 속상하네요. 나이 많은 전도사에게 저를 아내감으로 소개했다네요. 어떡하면 좋겠습니까? 저는 아직 어려요. 게다가 사모가 된다는 생각은 꿈에도 없고 도저히 가당치 않는 일입니다."
똑같은 기도를 반복해서 드렸다고 한다. 그런데 약속된 2주 후 토요일 오후에 이 집사의 딸에게서 전화가 왔다.
"전도사님. 잠깐 뵐 수 있을까요? 기도 응답에 대한 말씀을 드리려고요."
나는 너무 감사했다. 12살이나 차이가 나는 그 어린 자매와 결혼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린 처녀가 병원선교 활동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기도 응답은 분명 "결혼은 안 됩니다"라는 대답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런 내 생각은 여지없이 빗나가고 말았다. 임복향 자매의 입에서는 내 생각과는 다른 전혀 엉뚱한 답이 흘러나왔다.
"전도사님. 전도사님과 결혼하라는 응답을 받았어요. 저와 결혼해 주세요." 울며 2주 동안 기도했는데 마음의 평정이 오며 세미한 음성을 들었다는 것이다.
"너는 그를 네 남편으로 섬겨라. 훌륭하게 결혼생활을 하고 선교활동을 할 수 있다." 이렇게 응답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자 이번에는 내 울음보가 터졌다. "오! 하나님. 이 일을 어찌합니까…. "
내가 내 입으로 2주 동안 기도 후에 결혼을 결정하자고 약속을 했으니 거절할 수도 없고. 성령님의 역사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무슨 성질이 그리 급한지 그녀의 어머니 이진숙 집사는 그런 일이 있은 후 바로 다음 주 월요일에 혼인신고를 구청에 해버리고 말았다. 서류상으로 부부가 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각자 따로 생활하는 부부로 4년을 지냈다. 결혼식을 올리지 않은 관계로 불편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주민등록등본 한 통이라도 떼려면 임복향이 부인으로 등재돼 있었다.
아무튼 그후 4년 동안은 서류 떼는 일은 잘 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난 주님께 물었다.
"주님. 어찌 내 생애에 이런 운명의 장난 같은 일이 일어납니까. 장가갈 생각도 없는데 어찌합니까. 너무 불편합니다. 내 또래 교회 청년들이 그 자매보다 나이가 많습니다. 자매가 언니, 오빠라고 부르는 청년들이 많아요. 왜 이런 불편한 시련을 주십니까? 이진숙 집사가 큰 일을 벌려놨으니 어찌해야 합니까"?
그런데 어느 날. 기도 가운데 하나님께 이런 응답을 받았다.
"너는 경험이 있으니 병원선교를 해라. 그리고 네 아내는 젊었으니 공부를 해라."
졸지에 내 아내가 된 임복향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2년까지 줄곧 우등을 했었다. 하지만 1987년 아버지가 사고로 입원하는 바람에 그 충격으로 학교 성적이 많이 떨어진 상태였다. 교사가 되고자했다. 그러나 사범대 입학시험에서 낙방을 했다. 학력고사 점수가 낮았던 것이다. 그러자 아내는 충남 온양 소재 순천향대학교 식품영양학과에 수석으로 입학했다. 그리고 대학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내 임복향은 젊었으니 공부를 해라"는 기도 응답을 받은 것이다. 난 아내를 서울에 위치한 대학으로 편입을 시켰다. 서울에 위치한 교회 생활이 불편하고 통학거리가 너무 멀었던 것이다. 그래서 1학년 말 편입시험을 거쳐 서울 쌍문동 덕성여자대학으로 옮겼고 93년 졸업과 동시에 결혼식을 올렸다. 서류상 부부가 대외적으로도 부부가 된 것이다.
잠자리를 같이 하는 아내 임복향과 장래를 의논하기 시작했다. 특히 병원사역을 하며 내게 주셨던 소원을 실현해보기로 작정하는 기도를 드렸다. 병원에서 환자와 전도사로 만나게 하신 뜻이 의료선교에 있지 않겠냐는 내 의견에 아내는 선뜻 동의를 했다. 병원선교에 일조하겠다고 아내는 내게 약속했다. 며칠 후 아내는 의사가 돼 내 병원선교 활동을 돕겠다고 말했다.
그 날로 아내는 서울 노량진에 있는 학원에 등록을 하고 의대 입학공부를 시작했다. 말이 부부지 입시생을 돌보는 학부모와 학생같은 신혼기간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