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은 하나님 공의의 실현 도구 (5)
문흥수
대법원에선 매년 20여명의 법관을 미국 일본 유럽 등에 1년간 해외 연수를 보낸다. 그 중 한 명에게 하버드 법과대학원에서 공부할 기회가 주어진다. 초등학교 시절 미국에서 가장 좋은 대학이 하버드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가난하던 시절 내가 하버드에 가서 공부할 것이라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러던 내가 하버드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선발된 것은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내가 시편 23편을 묵상하며 살기 시작한 이래 내게 스스로도 깜짝 놀랄 좋은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 앞으로 또 내게 어떠한 일이 일어날지 모를 일이다. 다만 이 세상에서 아무리 좋은 일이 일어나도 내가 천국에서 주님을 만나 뵈올 일에 비교하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나는 미국에서 1년간 공부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미국은 각계각층의 전문가들, 그 중에서도 학자와 언론인이 사회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됐다. 의회, 정부, 법원, 금융, 기업, 연구소 등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 학자와 언론인들이 잘 알고 있으면서 잘잘못을 감시하고 비판하는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었다. 한편 미국 사회는 다수 인종이 모여 거대한 국가를 이루며 살고 있기 때문에 그 복잡한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길이 법률 이외에는 있을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법률이 그 역할을 다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국민들이 법관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존중한다는 점이다.
내가 미국의 법원 역사를 살펴보니 역사상 법원이 미국 역사의 발전을 가로막는 수구적인 판결을 하고, 그 이유로 국민들의 신망을 잃을 때가 더 많았다. 법원이 기득권자들의 이익을 보호하는 데 급급하던 때가 많았다. 지금과 같은 법원에 대한 신뢰와 존중은 주로 1950∼60년대에 형성된 것이다. 당시 미국 대법원장은 얼 워런이라는 분으로 참으로 탁월한 대법원장이었다. 링컨 대통령이 형식적인 노예해방을 이루었다면, 얼 워런이 이끄는 대법원이 실질적인 노예해방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그전까지만 해도 흑인들은 백인들과 함께 공부할 수도, 식사를 할 수도, 차를 탈 수도 없었다. 이 문제를 법원이 앞장서서 해결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법원의 기본적인 사명은 약자들의 권리를 보호해주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다수결의 원리만을 의미한다면 굳이 법원이 필요하지 않을 수 있다. 다수결로 재판을 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수결이라는 것이 언제나 남용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특히 군중심리에 휩쓸리면 사람들은 이성을 상실하게 된다. 또 독재자들은 대개 다수결의 이름으로 독재를 자행한다. 이것을 견제하고 모든 인간들의 존엄과 평등을 보호하기 위해서 법원이 존재하는 것이다.
미국에서 돌아와 다시 법관으로 일하면서 나는 약자의 권익을 보호하는 판결을 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경남 통영법원에 근무할 당시 대우조선의 노동조합원들이 '일사랑'이라는 도서실을 만들고 그곳에 '꽃 파는 처녀' 등 몇 권의 북한 서적과 진보적인 책을 비치하였다는 이유로 구속 기소됐다. 죄목은 반국가단체인 북한 정권을 이롭게 하는 서적을 비치했다는 것으로 국가보안법 위반죄였다.
나는 노조원들이 북한 정권을 이롭게 할 목적으로 그러한 서적들을 비치했다기보다는 북한의 실상에 대해 제대로 알자는 뜻에서 그런 서적을 비치했던 것으로 생각했다. 나는 구속된 노조원들을 석방하고, 관련 보안법 규정에 대해 위헌 제청 결정을 했다. 어떤 방법으로든지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한 자를 포괄해 처벌할 수 있도록 돼 있는 보안법 규정이 헌법상의 죄형법정주의에 위반되는 규정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 후 헌법재판소에서는 위 규정을 제한적으로만 적용해야 한다는 결정을 했다. 그러나 이후로 법원에서는 내게 형사재판을 잘 맡기지 않았다.
법원에 근무하는 동안 수많은 이혼 가정을 만났다. 이혼하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에게 나는 늘 "맷돌도 위아래가 맞아야 짝이 되고 고무신도 서로 맞아야 짝이 되는 것이다. 수십억 인류 가운데 짝이 되는 일이 하늘의 섭리 없이 되겠는가. 이혼하기 전에 최소한 절에 가서 100일 기도를 드려보든가, 교회나 성당에 가서 새벽기도나 새벽미사를 드려봐야지 인륜지대사인 결혼을 깨는 일을 심사숙고하지 않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책망을 많이 했다.
한번은 협의 이혼을 하기 위해 온 부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자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며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이 부부는 "판사님처럼 이렇게 말해주셔야지 법무사 사무실에 갔더니 아무 말도 않고 돈만 받고 이혼서류를 만들어주더라"고 법무사를 원망하며 밖으로 나갔다.
이 소문이 법원 근처 법무사들 사이에서 퍼져나갔다. 얼마 뒤에는 법무사들이 내가 당직인 주일에는 당사자들에게 아예 '문 판사는 이혼 주례(협의 이혼을 확인하는 일을 의미함)를 잘 해주지 않는 사람이니 한 주일 미뤘다가 다음 주에 가라'고 일러준다는 소문이 내 귀에까지 들려왔다. 나는 이런 일을 겪으며 합의 이혼 전 숙려기간의 필요성에 관한 칼럼을 쓴 적이 있다. 최근에야 그것이 법제화됐는데, 나로서는 좀 더 빨리 정착되지 않은 것이 아쉽기만 하다.
나는 1986년 중매로 아내와 결혼했다. 아내는 이화여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월드비전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아내를 소개받은 과정, 교제하고 결혼할 때까지의 과정을 돌이켜보면 참으로 하나님이 짝 지워 주셨음을 알게 된다. 아내는 모태신앙인이다. 장인 어르신은 영락교회 장로님이신데 오랫동안 군에 근무하면서 군 복음화를 위하여 애쓰셨고 퇴역 후에도 예비역 기독장교회 일을 열심히 하시고 회장까지 역임하셨다. 장모님도 영락교회 권사님이시다. 두 분 다 젊은이들처럼 건강하시니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신 은혜 때문임이 틀림없다.
아내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장래 결혼할 남편에게 은혜를 부어주시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대학 다니면서도 이성교제를 하는 대신 결혼할 사람을 생각하며 기도를 했다고 한다. 나하고 여섯 살 나이 차이가 나니, 아내가 남편을 위해 기도를 시작할 무렵 내가 성경공부를 하고 믿음의 길로 들어선 것은 하나님께서 아내의 기도를 들으신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아내는 지금도 후배들에게 이성 교제에 관해 상담할 때 이 이야기를 해주면서 장래 남편을 위해 기도할 것을 권면한다. 그런데 결혼 후 무려 15년 동안이나 우리 둘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나지 않았다.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해보았는데 아무 이상이 없다고 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나는 자녀를 위해 살기보다 세상의 불행한 사람들을 위해서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일찍부터 있었고, 우리 형제가 많고 조카들이 많은 관계로 별로 자녀에 대해 기도하지 않았다. 또 우리에게 자녀가 필요하면 하나님께서 언제든지 자녀를 주실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물론 아내는 시집에 대해서나 사회생활에 있어서나 여러 가지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아내가 특별기도를 하자고 하면 나도 따라주었지만 열심히 기도하지는 않은 것 같아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그러나 최근에 나는 우리 가정에 아기가 늦게 태어난 관계로 우리 두 사람의 영적생활 측면이 풍성해졌음을 깨닫고 있다.
야고보서 2장5절은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고 적고 있다. 수많은 자녀들, 엄청난 돈, 높은 지위와 권세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영적으로 풍성함을 누리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세상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신령한 삶을 살 가능성이 큰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적으로 가난한 것을 싫어할 일이 아니라 영적으로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는 조건임을 깨닫고 감사해야 할 것이다.
법관 생활은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큰 권한을 갖고 있지 않다. 겉에서 보는 것과 달리 화려한 것도 아니다.
사실 대부분의 사건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다단하다. 그 안에서 해답을 찾아내는 것이 법관의 일인데, 만일 해답이 없다면 최선의 해답을 만들어내야 한다. 법관들에게 양형(형벌의 양을 정하는 일)이나 과실 상계(채무 불이행이나 불법 행위에 있어 채권자에게도 과실이 있을 경우 그 과실을 참작해 손해 배상 책임과 금액을 결정하는 일) 비율, 위자료 액수 등을 정하는 재량이 있긴 하지만 그것도 최고의 적정성을 찾는 일이므로 결국 진정한 재량은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어려운 사건의 처리를 앞두고 있을 때에는 새벽기도 마지막 시간, 또는 기도 후 산책 시간에 골똘히 해답을 찾곤 했다. 사법연수원 시절 새벽기도 후에 공부하면 공부가 가장 잘 되었듯 지금도 어려운 사건 기록은 새벽기도 후에 주로 본다. 그렇게 하면 이전에는 몰랐던 지혜가 떠오르곤 하는 것을 늘 체험한다.
김영삼 전 대통령 재임 말기에 노동조합법 등 관계 법률을 노동자에게 불리하게 개정해 날치기 통과시키는 사건이 발생했다. 1996년 12월24일 새벽이었다. 당시 국회는 야당 의원들에게는 법안 처리 일정을 통지도 하지 않고 여당 의원들끼리 모여 법안을 통과시켰다.
노동계와 야당은 물론 수많은 국민이 통과된 법률의 무효를 주장하며 전국적인 투쟁에 돌입했다. 마주 보고 달려오는 기차들처럼 정부와 재야는 충돌 일보 직전에 놓여 있었다. 몇몇 시위 주동자들은 곧바로 구속됐다. 당시 나는 창원지방법원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모 재벌기업에서 노동자들의 파업을 금지하는 명령을 법원에 신청하였다. 나는 날치기로 통과된 법률은 위헌이고, 위헌 법률의 폐지를 주장하는 파업은 정당한 파업일 수 있다는 전제하에 날치기로 통과된 법률들에 대해 위헌 제청 결정을 했다.
다음날 이 사실은 전국에 일제히 톱뉴스로 보도됐다. 나의 위헌 제청에 뒤따라 대전지방법원에서도 위헌 제청 결정을 내렸고, 결국 김영삼 대통령과 여당이 당시 날치기로 통과된 법률을 무효화하고 다시 법안을 정비해 통과시키기로 야당과 합의하면서 사태가 정리됐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지만 만일 사태가 이와 같이 정리되지 않았다면 정부쪽에서는 수많은 시위 인사들을 구속했을 것이고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갔을 것이 분명하다. 나는 당시 나의 결정이 국가적인 난국을 타개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용기와 지혜도 당일 새벽기도 후 산책 시간에 얻은 것이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당시 정부는 대법원에 해당 사건 결정의 보도를 자제해 달라고 요청했었다. 정부가 어렵게 통과된 법률을 밀고 나갈 작정을 한 상태에서 법원의 위헌 제청 사실이 보도되면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대법원은 법원장을 통해 내게도 보도 자제를 요청했으나 나는 이를 알고 찾아온 기자에게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이 사건을 통해 나는 유명인사가 됐지만 동시에 나는 법원장들의 말을 잘 듣지 않는 법관으로 찍히게 됐다. 우리나라 법관들은 법원장들이 주관적으로 평가한 결과에 따라 승진 여부가 결정되게 돼 있고, 승진에 탈락한 법관들은 퇴직하는 관행이 확립돼 있다. 이는 글로벌 스탠더드에서 봤을 때 참으로 불합리하고 헌법상의 법관 신분 보장 규정에도 반하는 제도라고 생각한다. 법관들은 퇴직한 뒤 변호사 개업을 하게 된다. 거의 99.9%가 그렇다.
그 결과 법관들의 평균 연령이 40세가 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어제까지 법관으로 근무하다 변호사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국민들은 법원에 대해 언제나 전관예우라는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게 된다. 내가 이 문제에 대해 정면으로 문제를 제기하게 된 계기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