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수상 2월을 보내 이용삼 목사
2010.2.28
그랬었다. 겨울 내 한 번도 대지를 들어내지 않고 눈으로 덮여 있었던 올해의 시카고 겨울이다. 하지만 2월 하고도 마지막 날이다. 햇살은 날로 달라지고 아침이면 지저귀는 새 소리가 더욱 청아한 것은 봄이 눈앞에 있다는 말이다. 비오는 날에도 하늘에는 태양이 있듯이 한 겨울에도 봄을 품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의 지혜서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다. 한 사나이에게 A, B, C 라는 세 친구가 있었다. 때마다 서로를 신뢰할 수 있는 친구들이었다. 그 중에 A라는 친구를 그래도 제일 소중하게 아끼며 제일 필요한 친구로 생각하고 있었다. 어려운 일들도 제일 먼저 의논하곤 하였다. 친구 B도 믿을만한 친구다. 그러나 A와는 약간 떨어지는 친구다. C라는 친구도 같이 지내기는 하지만 그렇게 마음속까지 털어놓는 그런 친구는 아니었다.그러나 셋 다 귀한 친구들이다.
어느 날이다. 왕궁으로부터 메신저가 이 사나이에게 전달된다. 왕의 메시지는 아무 날 왕궁 재판정에 출두하라는 명령서였다. 사나이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다. 무엇인가 잘못 했기에 부르는 것일 터인데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자칫 재판정에서 ‘사형’ 하면 그것으로 끝이나니 도저히 혼자 갈 엄두도 용기도 나지 않는다. 실제로 그런 일들이 이 나라에는 비일비재 했었다. 하여 친구에게 같이 가 줄 것을 부탁해야 겠다 하고 먼저 제일 친한 친구 A에게 갔다.
그러나 사내의 부탁을 받은 A는 면전에서 거절해 버린다. 상상이나 했었던가. 평상시 그렇게 가까웠는데 거절하다니. 사내는 심한 상처를 받아 섭섭하였으나 어쩔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친구 B에게 가서 자초지종을 이야기 했다. 다 듣고 난 친구 B는 이 사나이의 무죄를 확신하여 주며 한없는 위로를 준다. 그러고는 “그래도 왕에게 같이 가 줄 수는 없네. 대신 왕궁 앞까지 친구를 위해 따라 가겠네” 하는 대답이었다. 그래도 하는 소망이 있었는데 무너진 것이다. 하는 수 없이 사내는 평소에 그렇게 기대하지 않았던 친구 C에게 모든 상황을 설명하고 함께 가 줄 수 있는가를 부탁한다. “좋아. 내가 함께 가지. 자네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걱정 말게. 내가 직접 가서 재판소에서 자네의 결백을 왕께 아뢰겠네” 뜻밖이었다. 얼마나 고마운지 평소 그렇게 못 미더워 했던 친구였는데 하는 마음에 가책에 이만저만 미안하지 않았다. 이 일로 사내는 A, B, C 중 누가 진정한 친구인가를 알았다.
지혜서 탈무드의 이야기는 그냥 이야기가 아니다. 이 이야기로 인생에 지혜를 가지라는 말일 것이다. 세 친구 A, B, C는 인간이면 누구에게나 있는 친구들이다. 왕의 명령한 재판정은 최후의 심판일 것이다. 곧 죽음을 의미한다. 친구 A는 다름 아닌 재물이다. 평소 재물이상 귀중한 친구가 어디 있겠는가. 없어서는 안 될 친구다. 그러나 그렇게 귀중한 친구라도 인생의 마지막 나팔 소리에는 하등의 도움이 될 수 없고 따라 갈 수도 없다.
친구 B는 가족과 친구일 수 있다. 죽음의 부름 앞에 즉 왕궁의 부름에 애통하는 마음으로 죽음을 따라 갈 수 있다. 그러나 화장터까지 혹은 무덤까지는 동행하나 최후의 재판석에는 따라갈 수 없다. 친구 C는 자비와 사랑의 구체적인 행위다. 이는 평소에는 달갑지 않는 친구이다. 왜냐면 이 친구 C가 있는 곳에는 손해 보는 것 희생과 아픔 등 달갑지 않는 일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은 그의 사랑과 자비는 영원히 남을 수 있고 결국 왕의 심판대 섰어도 당당할 수 있는 것이다. 심판대에서 질문은 이 땅에서 어떤 학교 어떤 직장을 다녔는가 하는 이력서가 아니라 무엇을 행하였던가 기준이 되기에다.
인간에게 진정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 아는 것이 참 지혜로운 사람이다. 인간에게 진정 소중하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 결국 아무런 값어치 없는 것일 수도 있고 이 땅에서는 별로 그 가치를 부여치 않은 보잘것없는 것이 오히려 영원한 값어치로 소중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미련한 인간은 순간적이고 영원치 못한 기준의 값어치를 위해 일생 땀 흘리는 사람들 아니겠는가?
하이티의 어려움에 온 열방들이 함께 땀 흘리는 사람들 보며 아니 교인들이 하이티를 위한 특별 헌금을 보내면서 중고등부 아이들이 음식 바자를 통해 World Vision으로 보내면서 그리고 영어부에서 일일 찻집을 통해 구제를 위한 모금 운동을 보면서 더욱 이런 생각을 해본다. 하지만 가장 영원한 것은 저 왕궁의 심판대 앞에서 가장 당당한 것은 다름 아닌 믿음 아니겠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은혜 아니겠는가.
살면서 아니 특별히 목회를 하면서도 A, B, C 같은 교우들을 만나게 된다. 평소 가장 의지하고 믿어지던 사람들 중 어느 날 갑자기 유다가 혹은 부루터스가 될 때도 있다. 그러나 평소 그렇게 보이지 않는 C 같다는 교우들도 문제가 생기면 제일 앞서서 손해보고 감당하는 것을 보는 때도 있다. 젊어서 이런 일들 당할 때 참 당황 했었는데 세월이 약이라 했던가 아니면 목회 연륜 가운데 무디어진 마음 때문인가. 아니 강퍅해진 마음 때문인가. 으레 그럴 수 있지 하는 마음을 보며 조금은 참담한 마음이 된다. 대신 적어도 나는 그러지 말자하고 스스로의 마음을 다잡아 본다.
예수님께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 중 A는 가롯 유다며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부르짖던 군중들 아니겠는가. 그리고 B는 제자들이며 골고다까지 따라가던 여인들의 무리 아니겠는가. C는 평소에 별 보이지 않던 아리마데 요셉이며 밤에 왔던 니고데모 아닐까. 생각해 보지만 어디에 C 같은 친구가 있겠는가.
내일이면 기미년 삼월 일일 삼일절 101 주년이다. 나라가 사나이 일수도 있다. 2천만 동포들 중 A 같은 친구도 B 같은 친구도 C 같은 친구도 있었지. 그러나 결국은 C 같은 친구의 아픔과 손해를 통해 오늘날 한국의 자긍심이 되어진 것이 아니겠는가. 이런 C 같은 친구가 없었다면 어떻게 저 밴쿠버 겨울 올림픽의 감동이 전달되어졌겠는가.
그리하여 더욱 C 같은 친구를 가지는 것은 어렵고 더구나 내가 친구 C 같은 내가 되는 것은 더욱 어렵겠지. 그래서 저 동토에서 몸부림치는 새싹과 같은 마음이기를 바란다. 언젠가 이 두꺼운 대지도 뚫어지겠지. 그래서 어두운 동토 안에서도 호흡은 있겠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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