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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가나안교회 |
날짜 : 10-03-10 14:08
조회 : 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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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수상 사순절의 소망 이용삼 목사
2010.3.7
회색의 겨울 하늘은 걷히고 찬란한 3월의 하늘이다. 지저귀는 새 소리의 톤이 다르고 햇살의 두께는 비교할 수 없는 3월이다. 겨울이 도를 닦는 선사와 같다면 봄은 은총의 부활이라 하지 않겠는가. 겨울은 하늘을 감동케 하여 항복을 받아 내고자 하는 인간의 마음이라면 봄은 하늘이 만들어 낸 하나님의 마음일까.
깊은 산속 송림 사이에 위대한 도사가 계심을 듣고 젊은 수도사는 물어물어 그곳까지 찾아갔다. 도를 전수 받기 위해서다. 기특히 여긴 도사는 젊은이에게 큰 도끼를 주며 숲속에 있는 아름드리 나무를 찍어 세 토막으로 잘라 올 것을 명한다. 젊은이는 도를 깨달을 수 있는 길임을 알고 열심히 딸 흘리며 베고 자르고 하였다. 세상의 잡념을 없이 하라고 노동의 길을 가게 한 것이리라 믿었다.
겨우 굴려서 온 세 토막의 등걸을 보시던 도사는 이번에는 그세 토막을 불사르라 명한다. 노동의 끝이라 생각하고 쉬는데 불사르라 하니 조금은 원망이 마음에 자리 잡았지만 머리를 흔들고 순종했다. 한참 불길이 나무를 태우고 있을 즈음 그리하여 거의 숯덩이가 될 듯 즈음 스승은 그 불을 끄기를 요구했다. 아니 명했다. 남은 것은 숯덩걸이었다. 스승은 그 숯덩걸을 이번에는 땅에 묻으라 한다. 어디에 쓸려고 땅에 묻는가 하는 조금은 불평이 나올 듯 했으나 어디까지나 도를 닦는데 하고 참으며 땀 흘리며 거대한 구덩이를 파고 세 개의 숯덩걸을 묻었다.
마지막으로 스승은 “이제 너는 이 산 아래 연못에 가서 입으로 물을 담아 이 숯덩걸에 뿌려라. 언젠가는 네 정성이 지극함을 하늘이 알아 줄 때는 이 숯나무덩걸에 움이 돋을 것이고 잎이 필 터! 그 때가 네 도가 트이는 날이려니...” 그렇다. 이제는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만 믿고 물을 뿌리는 것이다. 즉 성심을 다하면 하늘도 감동하여 생명의 역사를 이룬다는 뜻일 것이다.
여기서 인간은 숯덩걸일 것이고 물은 선한 일 착한 일들일 것이다. 이를 열심을 다 하여서 행하면 마침내 하늘이 감동하여 숯덩걸이라 하여도 싹이 필 것이다 하는 소망이다. 그럴까. 이것은 전적으로 운명과 숙명을 찾는 사람의 마음의 생각이고 계산이다.
하늘은 결코 나의 지성에 의해 감동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내가 하늘에 감동되는 것이다. 그것은 하늘이 나를 향하신 그 지극 정성에 내가 감동되는 것이다. 이 감동에 하늘이 감동하는 것이다. 하늘은 이미 나를 감동할 수밖에 없는 지극정성을 다 하신 것이다. 열심히 그것을 이룬 것이다. 십자가다. 갈보리 십자가다. 아들을 제사 상에 바칠만한 지극정성이 어디 있겠는가. 열심히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하나님은 그러셨다. 그것이 곧 골고다 사건이다. 이 놀라운 하늘의 열심을 알고 내가 감동 먹을 때 그리하여 눈물 나게 이 은혜에 감사할 때만 하늘이 감동하시는 것이다. 나의 지성에 감동되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지극정성을 다한다 하여도 하늘은 열리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열어 주셔야 열리는 것이다. 스가랴 선지자는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스가랴 3:2)라며 인간을 정의한다. 그런데 그슬린 나무 등걸에 하나님이 순을 나게 하시니 포도나무도 무화과나무도 자라게 된 것이다. 그 은혜에 감사할 때만 하늘이 감동하시는 것이다.
믿음은 도를 닦는 것이 아니라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나의 열심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다. 그슬린 등걸에도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믿는 것이다. 은총만을 구하는 것이다.
오 우러러 보십시오/ 흰 구름이 또, 잊어버린 아름다운 노래의/ 가냘픈 멜로디와 같은 푸른 하늘을 흘러갑니다/ 기나긴 방황의 끝낸 나그네의/ 슬픔과 기쁨을 한결같이 맞는 사람이 아니면/ 저 구름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태양과 바다와 바람과 같이/ 하얗고 정처 없는 것들을 사랑합니다/ 그들은 고향을 떠난 나그네들의/ 자매이며 천사이기 때문입니다/ 헤르만 헤세의 ‘구름’ 이다. 나그네의 길을 걷기 전에는 고향을 모른다. 아픔을 겪기 전에는 건강을 모르듯 말이다.
러시아는 위대한 문인들을 배출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시베리아가 있기 때문이다. 톨스토이의 ‘부활’ 도스도엡스키의 ‘죄와 벌’ 근래 솔체니친의 ‘수용소 군도’ 까지 온통 시베리아 이야기다. 시베리아 죽음의 유형이 없이는 살아있는 살아 숨 쉬는 작품이 나올 수 없을 것이다. 그곳에서 절망의 현장에서 마지막까지 놓지 않는 끈 소망이라는 후광이 말하는 것이 있다. 인간에게는 모두가 주기적으로 시베리아 있다. 그 시베리아 잔혹한 추위에서 얼지만 말자 얼어 죽지만 말자 반드시 부활이 있을 거야 하는 기나긴 동토의 동굴을 통과 하였기에 가능한 것이다.
사순절 기간이다. 믿음은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인간 중심이 아니다. 하나님 주시는 은혜를 전제하는 하나님 중심이다. 그래서 모든 이야기의 중심에는 사랑이 있는 것이다. 그 사랑은 희생이라는 터 위에 가능한 것이다. 믿음도 이 사랑의 은총과 희생에 그 터가 되는 것이다. 사순절은 하나님이 얼마나 기가 막히는 희생을 통해 우리와 가까이 하시게 했는가를 그 은총을 깨닫는 것이다. 그 은혜에 감격하는 것이다. 따라서 전적인 하나님의 사역이시다.
오래전 찬송가에는 ‘삼십 삼년 동안에 세상에 계셔/ 벙어리와 소경과 빈천한 사람/ 불쌍히 여기시던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고난은 무슨 연고뇨/ 가사가 있다. 다 주시고도 십자가의 모진 멸시를 당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렇게 만든 자들이 인간이다. 이러한 인간이 아무리 지성을 드린들 하늘이 감동하겠는가. 먼저 인간이 이 놀라운 은총에 감동되어 그 은혜에 눈물을 흘릴 때 하나님은 감동이 될 것이다. 그것이 신앙의 길이요 사순절에 깨닫는 믿음이다.
3월의 대기는 다르다. 그러나 3월만 있다면 그 대기의 다름을 모른다. 칙칙한 겨울이라는 시베리아가 있었기에 이토록 찬란한 햇살을 느낀 지저귀는 새소리의 달라진 톤을 느낄 것이다. 십자가와 무덤의 그 칙칙한 어둠의 시베리아가 있었기에 여기 놀라운 부활의 소식이 있는 것이다. 어떤 시베리아에게도 이 소망 이 부활의 소망의 끈은 놓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사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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